청년 마르크스 (The Young Karl Marx, 2017)
뭇 인문학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이름, 칼 마르크스와 그 동지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재미있게 봤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이하 맑스)와 엥겔스의 교류와 행보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이 20대 때 어떤 성격이었고, 어떻게 만나 어떻게 교류했으며,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기까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가 군더더기없이 깔끔히 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의 우정은 상당히 인상 깊었는데 마치 셜록과 왓슨의 관계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ㅋㅋ 누구에게든 하고 싶은 말은 신랄하게 다 해버리고 마는 맑스를 보면서 저러면 안될 것 같은데 하고 조마조마했는데 그런 괄괄한 맑스를 엥겔스가 침착하게 서포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상적으로 학문적으로 서로 번뜩이는 영감을 끊임없이 주고받고, 가끔 충돌하기도 하지만 보완해가는 둘의 우정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물론 실제 인물들도 영화와 비슷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론). 둘이 케미가 참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는듯.
맑스와 엥겔스의 아내인 예니와 메리도 인상 깊었다. 맑스-엥겔스의 관계와 다르지 않게, 예니-맑스, 메리-엥겔스도 연인일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진지하게 교류하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동지"였다. 영화에서 두 인물이 꽤 비중 있게 다루어지며, 각자가 가진 뚜렷한 생각과 강단이 나오는데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예니와 메리 두 사람 자체는 물론 그들과 남편들과의 관계도. 특히 메리와 엥겔스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인상 깊었는데 이것이 정녕 1800년대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대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엥겔스가 메리를 '일생일대의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도 좀 멋있었다. 이 영화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멋진 사람들을 몰랐을 뻔했지 뭐야. 예니 마르크스와 메리 번스.
맑스와 엥겔스 자체도 페미니스트였겠지만, 이 영화를 구성한 감독들도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만든 영화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제 너무 별로인 영화(킬 유어 달링)를 보고 영 찝찝했는데 역시 이렇게 깔끔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현실과 유리된 철학에만 관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정치고 사회고 머리가 아프고 왜 신경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생각이지만. 철학은 현실에 기반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해서도 안 되고. ㅡ라고 쓰긴 좀 그렇고 힘을 얻어서도 안 되고.ㅋㅋ 구름 속에 가만히 앉아서 떠다니며 요리조리 세계를 해석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그런데 십중팔구는 해석도 똑바로 못 한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삶으로부터 세상을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직접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심리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유물론자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는데, 이건 인간에 대해서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사회는 구성된다. 무슨 원대한 신의 뜻이나 "절대정신", 자유 의지 따위가 있는 게 아니라 권력 관계대로, 뇌의 활동이나 호르몬 혹은 유전적 경향성대로, 우연한 사건들대로, 제멋대로 만들어지고 그대로 흘러간다. 그래서, 땅에 두 발 붙이고 삶으로부터 관념과 이론과 선언을 만들어낸(물론 그 과정에서 정말 첨예하고 정밀한 사유를 통해서) 마르크스의 생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불도저같은 추진력도 정말 멋지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1840년대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열띤 말들이 2019년 아직까지도 공감이 많이 갔다. 아직도 그런 세상이랍니다 맑스쨩 하와와... 영화 말미에 "자본이 여전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큼 <자본론>도 계속 열려 있다"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도 참 맞는말이지. 시간이 흘렀어도, 형태는 조금 바뀌었으나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뼈다귀는 같아서. 그렇다고 내가 반자본주의자까진 아니고(사실 꽤 자본주의와 잘 맞는 체질이란 생각도 한다) 병폐의 본질은 같고 다만 아직 개선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금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맨날 마음만 먹고 읽는건 게을러가지고 몇 년이 걸릴지 혹은 몇십 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ㅋㅋ 아무튼 좋은 영화였습니다. 스토리도 그랬지만, 영상도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듯 깔끔하고 톤앤매너도 적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각함. 이걸 보고 똑똑한 남자랑 자본주의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살길이나 열심히 찾아나가야 하는데 자꾸 혁명에나 마음이 가서 큰일이다ㅋㅋ
(2019년 6월 3일의 기록)